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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역사 닥터 K 2014.12.24 4,624

 

 

 

 

 

1. 골프의 기원

 

‘골프’란 어원은 스코틀랜드의 ‘고프(Goulf)’에서 유래됐다는 것이 최근 골프사가들의 중론이다. ‘골프(Golf)’란 스코틀랜드의 고어로 ‘치다’인 ‘고프(Goulf)’가 그 어원이다. 고프는 ‘친다’를 의미하는 영어의 커프(Cuff)와 동의어인데 첫 글자의 C자가 스코틀랜드식인 G로 변화하여 고프가 되었고 점차 어휘가 변천돼 골프가 되었다는 설이다.

 

초기 골프놀이는 13세기 중엽, 스코틀랜드 지방의 양치는 목동들로부터 시작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넓은 초원에서 양치는 목동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초원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양몰이에 사용하던 지팡이로 힘껏 후려친 것이 초원에 뚫려있던 토끼굴속으로 굴러들어갔다. 이에 재미를 느낀 목동들은 몇 번씩 돌을 때려야만 구멍 속에 돌을 집어넣을 수 있는지 내기를 했고 이 놀이는 목동들이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재미난 놀이가 됐다.

 

지팡이는 점차 갈래 지팡이에서 끝이 굽은 모양으로 발전해 갔을 것이다. 스틱 모양의 이 지팡이가 목동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게 됐고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한 것이 체계화되어 오늘날의 골프클럽이 되었다고 한다. 양들이 풀을 뜯던 초원은 잘 정비된 페어웨이(Fairway)가 됐고 풀밭에 나뒹굴던 돌멩이는 골프볼(Ball)이 되었다. 여기저기 뚫려있던 토끼굴은 깃발이 꽂혀있는 홀(Hole)로 변했으며 양떼를 몰던 목동의 지팡이는 골프채로 발전된 셈이다. 일설에는 스코틀랜드 동해안의 어부들이 배에서 내려 집으로 갈 때 바닷가에 파도에 실려 온 나무막대기를 집어 들고 조약돌을 치다가 발견한 놀이라고도 한다.

 

스코틀랜드 목동들의 놀이에서부터 어부들에 이르기까지, 한낱 심심풀이에 불과했던 놀이가 인간의 경쟁 심리를 불러일으켜 경기로 발전한 것으로 분석됐다.

골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기록화된 공식적인 역사는 약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골프로써 알려진 경기를 15세기 스코틀랜드의 동부해안에 위치한 「Fife왕국」에서 시작하였다(www.golfeurope.com). 어떤 역사학자는 네델란드의 Kolven과 벨기에의 Chole이 골프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주장한다.

 

15세기 무렵, 스코틀랜드는 한창 이웃 잉글랜드와의 전쟁위협에 처해있었다. 모든 남자는 일정기간 무술훈련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골프에 온 정신을 빼앗겨 국토 방위임무에 소홀했다. 당시 골프에 얼마나 심취했던지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영토 방위의 제일 중요한 활쏘기 훈련보다는 골프에 빠져 급기야는 이를 금지하는 포고령이 떨어졌다. 이것이 1457년에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2세가 내린 골프금지령이다.

 

목동들이나 서민들은 할 수 없게 됐고 특권층인 왕족들만이 즐길 수 있게 되어 오히려 궁중 안으로 들어가 왕족의 경기로 바뀌게 됐다. 그러자 일부 귀족들과 서민들은 숨어서 골프를 했다. 그러던 중 15C말 화약의 발명으로 궁술 연마의 중요성이 사라지고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글래스고 협약(The treaty of glasgow)’체결로 스코틀랜드에 평화가 깃들면서 골프 금지령이 명분을 잃어 폐지됐다.

 

골프금지령은 사문화되고 골프인구는 점점 늘어 왕족은 물론, 귀족, 상인 심지어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기에 이른 것이다.

 

평화시대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로 인해 골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물론 그의 아들 제임스 6세와 메리여왕에게도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어린 나이에 골프를 배운 제임스 6세는 자신의 전용코스를 만들고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 플레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아이언은 잔디를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목재 헤드로 된 클럽만 사용할 수 있다는 법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제임스 6세 딸인 메리여왕은 1560년대에 주로 세인트 앤드루즈(St. Andrews)에서 플레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골프하러 에딘버러로 갈 때 수행한 프랑스 귀족의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를 프랑스어로 까데(cadet)라고 지칭하였는데 이것이 캐디(caddie)의 어원이라고 한다.

 

잉글랜드에서는 17세기에 스코틀랜드 왕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 제임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런던 근교인 블랙히스(Blackheath)로 그의 신하들과 같이 갈 때까지는 골프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그 후 빈센트 광장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의 운동장이된 터틀 필드(Turttle field)에서 골프경기가 열렸다. 이 터틀 필드는 학생들에게 업 필드(up field)라고 불려졌다. 이곳은 정규코스와 다르고 경기방식도 현재와 달랐다.

 

또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직계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왕이 1603년 잉글랜드 제임스 1세로 즉위했고 그 후 골프 플레이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골프장비에 대한 발전도 가져왔다.

 

에딘버러에 사는 활 제작자 윌리엄메인(William Mayne)을 왕실의 종신 클럽제작자로 임명하고 보급장교 제임스 멜빌에게 21년간 볼 공급에 대한 왕실 전매권을 인정하기도 했다.

제임스 왕의 두 아들도 어릴 때부터 골프를 접한 건 당연한 사실로 장남 헨리는 18세에 장티푸스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지만, 찰스 1세는 1642년 올리버 크롬웰과 그의 하원의원에게 참수형을 당하기 전 아일랜드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골프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19C 이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골프 중흥은 계속되고 점차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2. 골프의 발전과정

 

가. 태동기

세계최초의 골프코스는 1608년 제임스 9세가 설립한 런던에 있는 로열 블랙히스 골프클럽(Royal blackheath Golf Club)이라고 공인되고 있다.

 

1608년에 이 블랙히스 클럽에서 골프회가 조직되어 1766년에는 그 위세와 활동영역이 대단했던 것을 보면 꽤 오랫동안 존속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735년에는 영국의 에든버러에 로열 골핑 소사이어티(The Royal Burgess Golfing Society)가 창설되면서 5홀 규모의 코스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골프는 단순한 오락이나 여가선용의 놀이가 아니라 경기의 기능을 갖춘 플레이의 필요성이 요구되어 1744년 골프경기를 목적으로 한 세계 최초의 골프클럽이 조직되었다.

 

최초의 골프클럽이었던 리스 신사 골프회(The Gentleman Golfers of Leith)의 Duncan Forbes가 제정한 13개 조항의 골프 룰로 “규칙에 의거한 경기”의 형식화가 시작되었다.

리스 협회는 매년 한차례 실버클럽 경기를 개최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실물크기의 은으로 만든 골프채 쟁탈전을 벌였을 때 공식경기를 위한 공평한 규약이 필요함에 따라 리스(Leith)신사들이 중심이 돼 최초로 규칙을 제정했다.

 

총 13개 조항으로 규칙을 정한 “리스 신사 골프회(The Gentleman Golfers of Leith)”는 클럽의 성격을 지닌 “소사이어티(Society)"로서 오랫동안 골퍼들의 경의를 받고 있었지만 1843년 무렵부턴 서서히 그 위력을 잃어갔다. 그 이후 골프의 주류는 점차적으로 세인트 앤드루즈(St. Andrews)로 옮겨갔고 룰을 지키고 키워나간곳이 세인트 앤드루즈(St. Andrews)였던 것이다.

 

세인트 앤드루즈 골프클럽이 1754년에 정한 13개 조항의 규칙은 다음과 갔다.

 

1. 홀에서 1클럽의 길이보다 가까운 곳에 티를 만들어야 한다.

2. 티는 지면위에 만들어야 한다.

3. 티에서 볼을 쳐낸 후부터는 볼을 바꿔서는 안 된다.

4. 페어그린 위에서 볼의 위치로부터 1클럽의 길이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돌이나 동물의 뼈나 클럽의 부서진 조각 등을 볼을 치기 위해서 옮겨서는 안 된다.

5. 만약 볼이 물이나 습지에 들어가 버렸을 경우 볼을 꺼내어 해저드의 최소 6야드 뒤에서부터 치기 시작해도 좋다. 그리고 어느 클럽을 사용해도 좋다. 또 볼을 꺼내기 위해 동반 경기자에게 1타를 양보한다.

6. 만약 볼이 붙어있으면 뒤의 볼을 칠 때까지 앞에 있는 볼은 집어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7. 홀에 놓을 때 볼은 정직하게 치지 않으면 안 된다. 홀에 향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위치에 있는 동반경기자의 볼에 맞혀서는 안 된다.

8. 볼이 없어지든가 또는 다른 이유로 볼을 잃어버렸을 경우는 최후에 친 장소에 되돌아가서 또 하나의 볼을 드롭 하여 동반 경기자에게 1타를 양보한다.

9. 클럽이나 다른 무엇을 써서라도 홀에 볼을 넣을 때에 홀의 통로에 표지를 해서는 안 된다.

10. 만약 볼이 사람, 말, 개 또는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서 정지되었을 경우는 그 위치에서 볼을 쳐야한다.

11. 스트로크할 때 클럽을 끌어 올리고 나서 아래로 휘둘러 내리는 곳까지 왔으면 클럽을 그 후 어느 방향으로 가져가든 그것은 1스트로크로 셈한다.

12. 홀에서 가장 멀리 볼이 있는 자가 먼저 친다.

13. 골프장의 보호를 위해서 만들어진 수로나 도랑, 수채나 스콜라즈홀이나 군대의 참호선은 해저드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볼은 아이어 클럽의 어느 것을 사용해 티를 만들고 플레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골프클럽(The Gentleman Golfers of Leith)은 1768년에 The Honourable Company of Edinburgh Golfers로 이름을 바꾸고 1836년에 Mussel burgh로 옮겼다.

1754년에 Leith's Rule(13개조항)에 의한 연중경기를 하기위해 「The Society of St. Andrews of Golfers」를 만들었다.

그 후 1895년에는 세계 최초의 여성골프클럽이 구성되었다.

William왕이 1834년에 이 클럽을 “Royal&Ancient(R&A) of St. Andrews" 승인하고 새로운 클럽하우스는 1854년에 세워졌다.

이 클럽은 룰을 공포하고,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정당한 스포츠로써의 경기로 승격되었다.

 

나. 도약기

게임에 대한 획일적인 통합은 1754년 5월 14일 22명이 모여 세인트 앤드루즈 골프협회(The St. Andrews Society of Golfers)가 형성되면서 부터다. 이 모임은 애딘버러(Edinburgh)에 본부를 두고 가입된 회원들이 세인트 앤드루즈에서 경기전반을 망라하여 플레이어들의 경기에 관한 규제를 하기 시작하였다.

 

1851년에 설립된 Prestwick Golf Club에서 1860년 최초의 Major National Championship인 British Open을 열었고 William Park이 우승하였다.

 

Old Tom Morris는 British Open에서 1862, 1864와 1867년에 우승하면서 전설이 되었으나 그의 아들 Young Tom Morris는 1869년부터 4연속 우승하므로서 첫 번째 Great Champion이 되었다.

다른 우승자로서는 J. H. Taylor(1894), Harry Vardon(1896)과 함께 James Braid를 3두마차로 알려지고 있다.

 

1890년대에 이들 3두마차는 20여 년 동안 오픈대회를 석권하면서 1894년까지 모두 16차례나 영국오픈에서 번갈아 우승을 차지하며 초창기의 골프 스타가 됐다, 이 세 사람의 챔피언들이 골프 발전에 기여한 업적은 대단했다. 바든(Vardon)이 골프의 기술을 크게 향상시킨 반면 브레이드(Braid)는 골프코스 설계에서 눈부신 공헌을 했다.

 

반면, 테일러(Taylor)는 영국오픈에서 다섯 번 우승을 차지한 전설적인 기록도 유명하지만 선수로서의 뛰어난 자질에 못지않게 프로 골퍼들의 이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전력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01년 최초의 USPGA(United States Pro-Fessional Golfers Association)를 결성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894년에 USGA(The United States Golf Association)이 미국과 멕시코에서의 경기를 관장하기위해 설립되었다.

 

그리고, The US Open, US Ladies Amateur Open이 1895년에 거행되었다.

1900년까지 미국에 1000여개 이상의 골프클럽이 있었으며 Chicago에 18홀의 골프코스가 최초로 생겼다.

 

초창기 골프에서는 1라운드의 개념이 제각각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18개 홀의 전체를 완전히 플레이하는 방식이 아니었으며 코스의 지형이나 규모에 따라 달라졌다. 애딘버러(Edinburgh)시의 중심에 있는 유명한 브룬스필드 링크스(Bruntsfield Links)에서는 게임 때 6개의 홀만을 사용했고 노스 버윅(North Berwick)에서는 7개의 홀을, 글레인(Gullane)에서는 13개 홀을 사용하고 있다가 나중에 15개 홀로 늘였다.

 

머슬버러(Musselburgh)는 5개 홀, 그 후에 8개 홀(평상시의 대회에서는 2라운드 또는 16개의 홀), 그리고 몬트로우즈(Montrose)에서는 25개의 홀을 사용했다. 1864년에서 1870년까지 윔블던(Wimbledon)에서는 7개의 홀이 전 코스였으나 톰 던(Tom Dunn)이 경기를 할 때는 18개 홀로 확대했다. 블랙히스(Blackhearh)에서는 7개의 홀을 갖고 있었으며 평소의 대회 때는 21개 홀로 진행하기 위해 3라운드를 설정 한 바 있다.

 

1860년 12개 홀로 구성된 프레스트윅(Prestwick)에서 최초의 오픈골프선수권대회가 개최됐을 때 36개 홀을 완료하기 위해서 3라운드 경기를 치렀으며 이 경기는 1891년까지 계속됐다. 세인트 앤드루즈(St. Andrews)는 11홀로 왕복으로 22홀이다가 2개 홀이 폐지되어 9홀 왕복 18홀이 되어 18홀 1라운드의 개념이 생겼다. 세인트 앤드루즈의 기량이 뛰어난 골퍼들이 점차로 9개 홀 왕복으로 결국 18개의 홀로 골프게임의 한 라운드 표준숫자로 받아들여 경기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18개의 홀이 세인트 앤드루즈에서 가장 편리한 숫자였다는 사실이 관례화 되어 이것이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골프코스는 영국의 정형적인 Links코스와는 달리 Landscaped Parklands로 조성되었다.

 

미국은 Media와 Business Sponsorship으로 경기에 대한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며 1897년에는 최초 월간지 「Golf」가 발간되고 상업적으로 스폰서쉽의 경쟁으로 프로경기의 메카가 되었다.

 

그러나 차원 높은 품격 있는 경기는 여전히 영국에서 열렸다. 흥미롭게도 일반 대중들에 의해 프로경기보다 아마추어 경기가 인기가 좋았다.

 

다. 전성기

20세기 초 골프용품은 기술적 혁신으로 1900년 Haskel Ball이 개발되어 20야드 이상의 비거리가 더 보장되었다.

 

1902년 Grooved-face iron이 개발되고 1905년에는 William Taylor가 Dimpled ball을 개발하였다.

Hickory 샤프트가 25년 동안 널리 사용되고 있었지만 Arther Knight는 1910년에 Steel-shafted Clubs를 개발하여 골퍼들은 더 멀리, 더 정확하게 보낼 수 있었다.

 

PGA(The Professional Golfers Association of America)는 1916년에 결성되어 1944년까지 골프투어가 연간 22경기가 열렸다.

 

1921년에는 R&A가 USGA와의 조정으로 골프공의 크기와 중량을 규정하고 1951년 미국, 영국 두 지역의 골프 Rules의 대부분을 해결하였지만 골프볼에 대한 사항은 1988까지 해결되지 않았었다.

 

오늘날 골프는 R&A와 USGA에 의해 공동으로 조정되고 있고 공식룰을 새로 발간하기위해 매 4년마다 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1927년은 Ryder Cup경기가 열리게 되고, 유럽팀은 영국과 아일랜드 선수들이 대표했고 미국은 1935~1985년까지 1957년을 제외하고 승리하였다.

1979년부터 영국제도외의 선수들이 유럽팀에 가담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경쟁이 되었다.

 

라. 위대한 프로골퍼

세계 제2차 대전 전쟁전 기간중에 가장 위대한 골퍼는 미국인 bobby Jones이다. 그는 많은 승리중에도 최초의 Great Slamer이다.

 

1931년에 US와 British Amateurs, US와 British Open을 우승하였으며, 그 외 Sir Henry Cotton이 1963년부터 3연속 우승, Walter Hagen이 British Open을 4회 우승하였다.

 

당대의 위대한 여자 골퍼로는 1924년부터 5회 연속 English Ladies Championship을 우승한 Joyce Wethered와 1935년에 6번째 US Women's Amateur에 우승한 Glenna Collett Vare가 있다.

1933년 Augusta Golf Club Open하여, 1934년에는 Horton Smith가 우승한 첫 번째 US Open이 그곳에서 치러졌다.

 

1961년에는 남아공 출신의 Gary Player가 미국 프로골퍼들의 독식을 깨트렸고, 1980년대 이후에 몇 명의 영국 출신들이 우승하였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에서의 경기는 오랫동안 연기되었고 국방부는 모든 고무와 철등의 자원을 전쟁에 투입하였으며 전투적령기의 골퍼들은 군대에 입대하였고, 미국 골퍼들은 1942년 전쟁에 미국이 참가했을 때 입대하게 되었다.

 

Ladies PGA는 1951년에 설립되고(Eouropian LPGA는 1988년) 이것이 Women's Professional Golf Association을 대체했다. 첫 번째 Women's Open은 1946년에 열렸고 Patty Berg가 우승하였다.

당대 가장 위대한 여성 골퍼는 Babe Didrikson Zaharias일 것이다. 그는 1946년 US Women's Amateur 우승, 1947년 The Women's British Amateur 우승, US Women's Open을 1948, 1950과 1954년에 우승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3개의 올림픽 금메달과 세계기록보유의 육상종목 운동선수로 은퇴 후에 골프를 시작한 선수였다.

 

전쟁후 대부분의 골퍼들은 상금이 많은 미국에서 경기에 많이 참가하여 이런 이유로 R&A는 경기상금을 올려서 톱 프로선수를 유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1960년대는 Arnold Palmer. Jack Nicklaus와 Gray Player 신 삼두마차의 시대였다.

그들은 거의 전 세계 모두 주요 Major event를 석권하였고 유명 국제경기에서 격돌하였다.

Nicklaus의 경우 US Open 4회, US Master 6회, US PGA Championship에서 5회 우승하였다.

 

1970년대에 가장 유명한 Golf shot는 수백만 시청자들이 보는중에 Alan Shephard가 달에서 친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1970년대에는 Gray Player가 세계 골프를 지배했다.

단지 Severiano Ballesteros가 1979년에 British Open 우승과 1980년 US Masters 우승했을 뿐이다.

 

그리고 Sandy Lyle, Nick Faldo, Colin Mantgomerie가 세계 골프에 영국인으로서 경쟁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Ryder Cup에서는 28년간 미국 독점을 1985년에 Tony Jacklim이 주장으로 유럽팀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이었다.

 

Solheim Cup은 1990년 시작하였다.

1991년 유럽인중에서 Ian Woosnam이 Sony World Ranking의 Top에 처음으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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